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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자료-선교역사 운영자 201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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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ungdongclinic.onmam.com/bbs/bbsView/26/362685



방글라데시를 위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간략한 한국 선교사 역사와 앞으로의 계획)

 

방글라데시에서 개신교 선교 역사는 한국의 두 배에 가깝다.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캐리가 1793(?)년부터 뱅갈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지금은 인도와 방글라데시로 나누어진 상태이지만, 당시는 인도 동쪽 지역이 뱅갈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윌리암 캐리 선교사는 캘커타와 세람포어에 거주하면서 뱅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지금도 그의 번역본은 한국의 개역성경처럼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선교 사역으로 뱅갈 지역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여러 명의 현지 전도자들이 생겨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윌리암 캐리는 뱅갈 지역 선교에 기초를 세웠지만, 힌두교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여 성경을 번역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슬람교인보다는 힌두교인을 개종시키기 위한 선교에 주력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대다수 초기 기독교인들이 힌두교의 하층 계급에서 개종한 사람들이어서 이슬람교인이 주축으로 독립한 방글라데시에서 기독교인들은 힌두교인과 같이 비춰져서 사회적으로 거부당했고, 윌리암 캐리가 번역했던 성경도 힌두교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슬람교인들이 읽기 싫어하는 책이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윌리암캐리는 힌두교인을 복음화 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슬람 선교에 있어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왔다.

1980년대에 선교 전략에 상황화 영향력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기독교 선교 방법이 이슬람 교인을 전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을 서양 선교사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슬람교인을 선교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식의 부복기도나 손을 하늘에 향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구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슬람의 기도방법을 받아 들였다. 또한 이슬람교인이 종교적이라고 느끼는 의상과 수염을 기르는 일도 수용하였다.

심지어는 전도를 위해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코란의 수라를 인용하기도 한다. 또한 성경 번역을 이슬람 종교 언어를 이용하여 새롭게 번역하여 사용한다. 이슬람교인들이 메카를 향해서 기도하는 것을 도입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방향이 같아서 오해를 살 소지가 충분했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이들을 이슬람 사회에 그대로 남게 하여, 모스크에 계속 다니게 했고, 소를 바치는 예식까지 허용하였다. 이러한 상황화 선교 전략은 이슬람 사회가 기독교를 더 수용적으로 받아들이고, 개종 이후 이슬람 사회에서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막았지만, 전통적인 기독교 공동체와는 단절을 가져왔고 통합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선교에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는 점에서 가치를 부여할 만하다.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인이 선교 사역을 한 것은 약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74년 장로교 통합측의 정성균 선교사가 전주 예수 병원에서 사역을 하였던 커딩턴 의료 선교사와 방글라데시에 들어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정성균 선교사님의 첫 사역의 열매였던 밧다라 초등학교베들레헴 교회 96년 발견하여 이웃사랑회 방글라데시 지부에서 교사 관리와 운영을 하게 되었다.

한국 장로 신문 2002 9 14일자에는 정성균 선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신대 67회 졸업생인 정성균 선교사가 1974 복음의 빚진자로서 빚을 갚기 위해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무지하여 병들어 죽어가는 회교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선교를 시작할 정성균 선교사를 기도로 돕기 위해 장신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선교파송연구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물질적으로 선교사를 도울 선교 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것이 모체가 되어 67 동기들과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선교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방글라데시 선교회를 조직하여 정성균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한국인의 이슬람 선교가 시작하였다. 정성균 선교사는 5년 동안 방글라데시에서 교회와 밧다라 초등학교,통기 지역에 난민수용소를 세워 선교, 교육, 의료, 사회 사업을 했으며 한국의 의료진과 신학교수,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진료를 하거나, 전도를 하고 세례를 베풀며 훌륭하게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방글라데시에서 5 동안 사역을 정성균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학을 공부하고, 많은 후원자를 개발하여 1980 다시 방글라데시에 입국하려고 했지만, 세례를 것이 문제가 되어 입국이 금지 당했다. 그는 파키스탄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방파 선교회 조직하고, 구쯔단왈라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14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다가 40세가 되던 1984 7 간염으로 순교하였다. 정성균 선교사의 10 간의 선교 활동의 열매는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곳곳에서 찾을 있다.”

 

밧다라 초등학교 교사 중에는 정성균 선교사에게 직접 세례를 받은 선생님이 4명이나 있었고, 중에 가장 헌신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난투 선생은 만일 정성균 선교사가 계속 이곳에 살았다면 밧다라 지역은 거의 복음화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성균 선교사는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교에 대한 열망만으로 이슬람 사회의 벽을 뛰어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이슬람인에게 세례를 주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 증서를 발행한 것이 화근이 되어 방글라데시에 이상 머물 없었다. 정성균 선교사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읽으면서 한마디로 열정의 선교 시대라고 정의하고 싶었다.

정성균 선교사 이후, 이용웅 의료 선교사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NGO 역할을 함께 하는 기독교 개발 선교 사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방법의 복음 전파나 교회 개척이 방글라데시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1990년에 한국의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방글라데시 개발협회(KDAB)’라는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도 주목할 만큼 규모의 NGO 사역을 시작할 있었다. 연합 NGO 사역에는 감리교, 성결교, 예장 합동측 중부노회, 가나안 농군 학교 그야말로 초교파적 연대를 이룬 것이었다. ‘방글라데시 개발협회 사역의 영향으로 방글라데시의 다른 지역에서도 한국 선교사들이 NGO형태의 사역을 하게 되었다. NGO 시대였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의 연합 사역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개발협회 소속된 한국인 선교사들의 내부적인 갈등으로 점차 사역을 독립하게 되었다. 경우 외에도 한국인 선교사들의 연합 사역은 길게 가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이유는 리더쉽이 분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갈등이 심화되어 한국인 선교사가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를 서로 고발하고, 추방하는 일이 발생한 적도 있다. 끊임없이 한국인 선교사회를 분리하려는 유혹을 지혜롭게 분별하고, 깊이 회개하면서 선교사들을 분리하려는 영적 세력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모진 결심과 헌신을 해야 한다.

1999 감리교 선교사의 제안으로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범교단적인 목회자 훈련원이 세워졌다. 2000년에는 장로교의 여러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교회의 법적 지위를 위해 연합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세운 교회 건물 가지고 있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글라데시 장로교 교단을 창립하였다. 이것을 통해 일년 장로교 전도자를 훈련하고 배출시키기 위한 교단 신학교가 세워졌다. NGO 중심의 사역이후 목회자 훈련원이나 신학교를 통한 선교 목회적인 차원의 새로운 연합 사역이 활발해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한국 선교는 방글라데시 선교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한국 선교사들이 주력하고 있는 선교 대상자는 방글라데시 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인(0.5%), 소수 부족(2~3 %), 힌두교인(9%) 대부분이다. 85% 이상의 이슬람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사는 극히 드물다. 복음 전파가 쉽게 되는 대상에만 선교사가 몰려 있어, 갈등이 가중되고 현지 교단들과 불편한 관계를 쉽게 만들곤 한다. 1998년에는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교단인 침례교단에서 한국선교사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실제로 현지 교단 지도자들에 의해 한국인 선교사가 추방된 사례도 있다. 추방된 이유는 현지 교단의 성도와 전도자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첫째 이슬람 선교에 준비가 되지 않은 선교사 자체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2~3 내로 선교의 결과를 보기 원하는 한국 교회의 성급한 압력이 몫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 내에 사역의 성과를 보기 원하는 한국 교회는 결국 방글라데시에서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장로교 합동측에서 방글라데시 현지 목사를 한명 발굴하였다. 한국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훈련을 받은 그는 1992 교단 선교사로 방글라데시에 역파송되었다. 그는 현지인이라는 신분을 백분 이용하여 방글라데시에 돌아온 2 만에 60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를 후원했던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는 바로 이런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곳곳에 홍보하였고, 방글라데시에 교회 개척과 신학교 건립을 하기위해 수억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소문이 들려 오고, 그와 함께 한국인 선교사가 파송되면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한국인 선교사는 현지 목사와 함께 동역을 없어 단독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한국인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에서는 그를 한국으로 강제로 돌아오게 하려했지만 선교비가 중단되더라도 방글라데시에서 사역을 계속하겠다는 선교사의 결심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현지 목사는 계속 그를 추방하려고 하였고, 다른 한국 선교사에 대해서도 앙심을 품고 한국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일에 앞장섰다. 후에 드러난 사실은 한국 교회에서 후원한 선교비로 그는 자신과 동생의 이름으로 토지를 구입하고, 한국에서의 후원이 중단되자 그가 개척했던 60 개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세웠다는 교회는 후원금으로 세워진 교회였다. 이후 현지인 목사는 뇌출혈로 반신 불수가 되었고 치료를 위해 미국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결혼한 한국 아내와 이혼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한국 교회의 후원으로 차지한 땅을 관리하는 그의 동생은 지금도 곳곳에서 한국선교사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

한국 감리교 교단에서 시작한 방글라데시 선교도 분열된 가운데 시작되었다. NGO 사역을 주도하는 C 선교사와 교회 개척과 목회자 훈련에 집중하는 J선교사 그리고 현지인 목사인 D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물량주의 현지 선교로 분리되어 있다. 현지인 목사 D 한국의 몇몇 감리교회로부터 억을 지원 받아서 수도 다카에 대규모 교회를 건축하였다. 교회 내의 모든 성물도 한국에서 보내 것이었다. 그가 목회했던 교회의 성도는 명에 불과했는데, 수백 명이 들어갈 있는 건물을 건축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슬람 사원 근처에 교회를 건축하는 바람에 외교적인 문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결국 문제는 방글라데시 주재 한국 대사관이 불려가, 종교 문제는 한국 정부가 개입할 없는 것이라고 해명하여 일단락 되었다.

한국의 많은 교단과 선교 단체가 방글라데시의 복음화를 위해 수십 억을 후원하였지만, 기독교 인의 수는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한국인 선교사를 영적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고, 많은 물주로만 여기는 사실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하면서, 현지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후원을 요청하는 현지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부턴가 현지 교회를 향하는 걸음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상황은 이해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없어서 안타까웠고, 돈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물질 중심의 사고 방식을 변화 시킬 없는 나의 한계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의 반복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방글라데시 땅에서 놀라운 일을 역사하신다. 특별히 전부터 뱅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나오는 어린 영혼들이 주일학교를 가득 채우는 역사를 많이 발견할 있다. 내가 일했던 밧다라 초등학교 옆에 함께 세워진 베들레헴 교회는 1996년까지 명도 되는 아이들이 주일 예배를 참석했지만, 작년부터는 200명이 넘는 아이들로 예배당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9.11 미국 테러이후 정부에서 교회를 보호한다고 경찰을 파견하였다. 현지 교회 지도자들은 두려워하며 주일 학교를 잠시 중단하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교회 문을 닫지 말아 달라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교회에 오고 싶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답변은 뱅갈 아이들이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주일 학교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이곳 아니라 방글라데시의 다른 주일학교에서도 이런 감사한 열매가 맺히는 것을 있었다.

하지만 열매가 맺히는 곳에는 항상 사탄의 방해도 따라온다. 밧다라 초등학교를 운영한 3년째 되던 98 이었다. 밧다라 초등학교는 힌두교 사원의 땅에 세워져 있다. 밧다라 지역은 주로 힌두교인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때문에 밧다라 힌두교 위원회 총무와 힌두교 청년들이 학교 운영권을 넘겨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거절하자 그들은 교실에 자물쇠를 채우고, 학교 간판을 자신의 것으로 변경하며 행패를 부렸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학교 운영권은 자기들에게 넘기지만, 계속적으로 재정 지원은 해달라는 요구였다. 3개월이 지나서야 문제가 해결되었다. 방글라데시는 부패한 경찰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마을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게 위해 자주 지역 회의를 개최하는데, 문제도 학부형을 주축으로 지역 회의가 열려서 문제를 일으킨 힌두교인들을 추방하는 결의가 내려지면서 마무리되었다. 결국 그들은 마을에서 추방되어 지역에서 나타날 없었고, 다시 학교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학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사건은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운영하는 모든 선교사들은 이런 어려움을 겪곤 한다. 하지만 끝까지 견디는 선교사들은 주님의 동행과 승리를 맛볼 있었다.

 

하나님은 한국 선교사를 통해 곳곳에 기적을 행하셨다.

방글라데시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기적은 1999 한국에서 단기 선교팀이 농업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함께 힌두교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6개월 동안 후두염으로 고생한 마을 여인이 자신의 목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다. 우리는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고쳐줄 없다고 말했지만, 여인은 제발 치료해달라고 했다. 단기 선교팀이 당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녀도 좋다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분만에 말도 편하게 없었던 그녀가 목청이 터져 스스로 치유되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건을 동네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환자들을 데리고 왔다. 지역은 교회나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지역이었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던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기적을 통해 농업 사업장에서 일하던 이슬람 직원들이 많은 충격을 받았다.

종종 이러한 치유의 역사를 경험할 있었다. 결핵이 걸렸던 아줌마와 복수가 차서 배가 불룩했던 아이가 기도 후에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있었다. 물론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감사할 있었고, 치유를 목격한 현지인들은 충격을 받아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치유의 기적을 통해 가정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진짜 기적도 일어났다. 이러한 기적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경험할 있었다. 이전까지 보수 교단에서 자라나 이런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현재에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입술로 고백할 있게 되었다. 나아가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서 방글라데시에서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사명을 발견하였다.

 

선교사에게 가장 커다란 사명이며, 가장 감당하기 힘든 일은 바로 우리가 섬겨야 할 현지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제까지 선교지에서의 경험은, 물량 공세나 혹은 기적적인 능력도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불가능한 사명(Mission Impossible) 어떻게 이룰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하나님은 나에게 다른 사건을 체험하게 하셨다.

2001, 유난히도 더운 날씨였다. 도시 빈민가 탁아소에서 돌보던 정도의 아이가 탈수로 생명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빈민가 사역을 시작한 번째로 겪는 일이었다. 우리가 돌보던 어린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아픔에 탁아소를 담당했던 현지 직원에게 정확한 경위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우리의 잘못은 없다는 내용의 보고를 하였다. 뱅갈인은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녀 역시 다른 뱅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고된 내용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는 빈민가를 찾아가 아이 엄마를 만나며 직접 조사를 하였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영양실조 상태가 심각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니던 봉제공장에 3 휴가를 받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아이는 주동안 입원해야 형편이었다. 하지만 직장에 다시 출근하게 되면, 병원에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이의 엄마는 강제로 이혼 당한 상태였고 직장을 잃을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퇴원 시켰다. 하지만 직장에 돌아갔을 , 그녀는 이미 해고된 상태였고, 아이를 탁아소에 보낼 없어 집에서 돌보다가 아이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하루 만에 숨을 거둔 것이었다.

아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탁아소를 관리하던 현지 직원이 병원에 입원한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방치한 것이었다. 직무 유기였다. 다음날 아이가 묻힌 공동 묘지에 아이의 부모와 함께 갔다. 손바닥만큼 작은 아이의 앞에서 엄마는 또다시 통곡하였다. ‘다시 살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울부짖었다. 역시 작은 묘지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아이를 방치했던 현지 직원을 그냥 두어서는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자세한 경위를 묻고 내가 조사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직원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직원의 변명을 들으며 울분이 치솟았다. 어린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에 분노가 끓어 올랐고, 직원을 해고시켜야 겠다고 결론을 내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 집에 돌아와 기도를 하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엄마가 병원에서 아이를 퇴원시킨 , 다시 탁아소로 아이를 데려올 없는 이유가 바로 탁아비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수혜자를 구걸하는 거지로 만들어서는 된다고 판단하고, 개발 사역이 자립해야 된다는 이유로 한달에 한국 돈으로 천원 정도의 탁아비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탁아소 운영 규정을 강력히 시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직장에서 해고 당했기 때문에, 탁아비를 없었고 이유로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지 못하다가 아이를 잃는 변을 당하였다. 현지 직원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맡기려 했던 나의 행동을 깊이 회개 하였다. 회개를 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다음 모든 직원들 앞에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나의 잘못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의 잘못을 용서해 것을 요청했다.

나의 고백 이후, 현지 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되었다. 책임 만을 물었던 입장에서 공동 책임자의 모습으로 나아갔다. 현지 직원들도 조금씩 변화하였다. 그들의 변화는 선교사인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깨달았다. 현지인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특별한 신유 능력이나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특별히 용서와 회개에 있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일하시면서 약자들의 죄악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분은 죄를 정죄하기 위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땅에 오셨다. 그런데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지로 들어가면서 그들의 죄가 용서 받도록 우리를 희생하려고 하지않고, 그들을 정죄하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사랑하는 방글라데시는 홍수, 더위, 질병, 무지와 가난이 있는 곳이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 사랑의 간섭이다. 방글라데시에서 나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할 있었고, 가운데서 자신도 성장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방글라데시에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모든 이들의 고백이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부자 나라에서 우리에 가르침을 주었다. 게다가 나의 사랑하는 딸이 태어난 나라이기에 방글라데시는 나의 번째 조국이 되었다. 비록 덥고 생활하기 어려운 나라이지만 그곳에서 경험한 일을 떠올릴 때마다,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은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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